Thursday, June 20, 2013

조선적


재일동포의 구성

글: 일본 한민족문제연구소 소장
 
1945815, 일본 패전과 동시에 해방을 맞이한 재일동포사(在日同胞史)1910년 한일합방부터 시작, 2015년에는 분단 70주년을 맞이하게 된다.

일제강점기 한반도에서 출생한 1세들은 거의 사망했으며 이들은 망국(亡國) 유랑민(流浪民)이었다. 해방 후 일본에서 태어난 2세들도 벌써 나이가 들었으며, 이들은 분단의 상처를 안고 헤매던 시대이다. 1990년대 냉전체제 붕괴 후 태어난 3, 4세들은 통일조국을 맞이하는 시대이며, 이들은 재일동포의 미래를 이어 가면서 통일조국과 일본 사이에 가교역할을 할 남북의 공동자산이며 세계화를 맞이한 21세기의 한민족공동체(Global Korean Network)의 일본 공간을 창출하는 예비군이기도 하다.

해방 후, 230만 명이었던 재일동포도 귀국, 사망하여 지금은 그 후손이 50만 명(한국국적조선국적이며 주로 협정영주권자)과 그간 일본국적으로 귀화한 귀화동포 30만 명(보통 한국계 일본인) 그리고 한일 수교후 한국여권을 가지고 일본에 입국하여 정착한 동포 20만 명(일반영주권자, 주로 한국국적). 이상 , 100만 명이 재일동포사회를 구성하고 있으며 한국국적은 한국민단, 조선국적은 조선총련 두 조직으로 갈라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하여 흔히 재일동포를 

㈀ 재일한국조선인(주로 일본 언론기관이 사용중), 

㈁ 재일 한조선인(모모야마대학 서용달 교수가 1992911日本每日新聞에서 제창 사용 중

㈂ 재일 코리안KOREAN (한국국적조선국적귀화동포까지 포함해서 포괄적으로 이 명칭을 사용하는 경향이 있음)라고 불러 재일동포뿐만 아니라 일본사람까지 혼란시키고 있다.

 
2. 식민지 후손
 
그러면 식민지 후손이란 어떤 존재인가.

625동란이라는 동족상잔까지 경험한 남과 북이지만 1910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적으로 합방한 것은 '무효'라는 공통된 역사인식은 줄곧 변함이 없었다. 알기 쉽게 말하면 그때 일본에 건너간 동포들은 대한제국여권도 일본여권도 없이 일본에 입국한 것이다. 재일동포의 국적문제는 바로 그때 그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서 정리해 봐야 된다.

194881538선 이남은 대한민국, 이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194899)이 수립될 때 재일동포는 남(한국)과 북(조선) 어느 측인가의 국적과 정권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지지할 수 있었는가 하면 사실 그렇지도 못했다. 그것은 당시 재일동포가 일본에 거주하고 있었고 남북 양측이 일본과의 외교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19524월 일본이 미 점령군으로부터 주권을 회복한 이후 재일동포가 한국조선일본 세 나라 국적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는가 하면 일본정부는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다.

독일이 패전 후 재독 오스트리아인에게 영국이 버마(미얀마)의 독립을 승인할 때 알제리아가 독립할 때 재불 알제리아인에게 각 종주국은 국적선택의 기회를 부여했다. 그러나 일본만은 재일동포들에게 그러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당시 일본정부는 재일동포는 가까운 시일 내로 독립된 조국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판단을 하였고, 또 돌아가지 않으면 추방하는 추방정책을 취하였다. 또 재일동포도 귀국을 기다리면서 일본에 체류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재일동포를 일본국민으로서 일본에 입국시켰지만 그때 재일동포는 일본국민이란 감정은 티끌만치도 없었고 오히려 대한제국국민이라는 감정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일본이 패전하고 한반도가 독립함을 계기로 한반도 출신이라는 독립국 국민의 의식을 뚜렷하게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해방직후 '한국'이라면 곧 한반도 전체, '조선'이라면 조선반도 전체를 의미했던 것이다. '한국''조선'은 같은 뜻으로 남북 전체를 의미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분단된 한국''분단된 조선'도 없었다. 즉 재일동포들의 마음은 오직 독립된 조국과 해방된 민족으로서 벅차있었을 뿐이다.

때문에 해방직후 일본이 실시한 외국인 등록신청에 있어서도 국적란에 '한국'조선'을 같은 의미로 자유롭게 썼던 것이다. 해방직후 재일동포사회에서는 국적이 한국이라도 좋았고 조선이라도 좋았다. 또 일본정부도 별다른 구별을 하지 않았다. 재일동포가 국적을 '한국'으로부터 '조선'으로, '조선'으로부터 '한국'으로 소위 국적변경신청을 하면 일본정부도 그를 인정했다. 당시 재일동포사회의 국적변경은 주소변경과 같은 의미밖에 없었고 또 그처럼 자유로웠다. 대부분의 동포들은 관례로서 조선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조선''한국'으로 변경할 수는 있지만 '한국''조선'으로 변경할 수는 없게 되었다. '한국''조선''일본'으로 변경(귀화)할 수 있게끔 귀화허가를 하지만 귀화 후 '일본' 국적을 다시 '한국''조선'으로 되돌아 변경할 수는 없게 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선'국적만 줄어들고 '한국'국적이 다소 늘어나지만 마지막에는 일본국적만이 대량 늘어나는 것이 국적을 둘러싼 재일동포의 현실이다.
 

재일동포를 하나로 하는 법적지위


 
그것은 19656'한일국교정상화'와 동시에 조인된 재일한국인의 법적지위협정이 발효됨으로써 그때까지 같은 뜻으로 사용해왔던 '한국''조선''한국'만이 국적으로 인정하고 '조선'은 국적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1965년 재일한국인의 법적지위협정은 한국국적으로 인정된 재일동포와 국적 인정을 받지 못한 재일동포로 분할시키는 결과가 되어 버렸다. 항간에서 1965년 체결된 '재일한국인의 법적지위 협정'을 분단조약이라는 비판을 하는데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와 같이 1965년 한일회담 타결과 동시에 체결된 재일한국인의 법적지위협정은 '한국'국적 소유자만이 대상이 되어 있다는 점에 기본적인 모순이 있다. 이 모순은 43년이 지난 지금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식민지 통치라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오로지 거주역사(居住歷史)’만으로 법적지위를 체결했으면 그 후의 재일동포의 분할통치는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Monday, June 17, 2013

Economic freedom in North Korea


Read more about North Korea, Republic Of Congo , South Korea Economy. See more from the 2013 Index.


North Korea is largely isolated and disengaged from the world’s economy. Data collection is extremely challenging, and reported statistics on the economy remain largely speculative, requiring careful evaluation. North Korea’s economic freedom score is 1.5, making its economy the least free in the 2013 Index.

North Korea remains an unreformed and essentially closed dictatorial state. Despite experimenting with a few market reforms over the past decade, the world’s most repressed economy adheres firmly to a system of state command and control that upholds the regime’s long-standing songun (“military first”) policy. The Workers’ Party tightly controls every aspect of economic activity. 

The impoverished population is heavily dependent on government subsidies in housing and food rations, and the state-run rationing system has deteriorated significantly in recent years.North Korea may be attempting to open its economy slightly by encouraging limited foreign direct investment. However, the dominant military establishment and ongoing leadership transition make any substantial near-term economic policy changes unlikely. Normal foreign trade is minimal, with China and South Korea being the most important trading partners.


Wednesday, May 29, 2013

Be Connect!

창조는 네트워킹이다. Be Creative! 


북쪽의 고향을 떠난 지는 14년, 남한살이는 어느덧 9년이 되니 창조적인 사람이 되라는 이 구호는 저에게도 너무 뻔한 문구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성공하기 위해서, 혹은 특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창조적이고 독창적인 인재가 되라곤 하죠. 


그러나 저는 Be Creative가 아닌 Be Connective라고 외치고 싶습니다.

올해 저는 건국대학교 수의학과를 졸업했지만 지금은 전공과는 좀 색다르게, 여러 가지 새로운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진행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남한청년, 북한청년, 해외교포친구들과 함께 무역회사 창업 준비 등 현재 12개의 프로젝트들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들 모두 기존에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들입니다. 그러나 거창하게 이전에 없었던 것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있었던 것들의 연결고리를 찾아 다리를 놓다보니 새로운 것이 만들어졌죠. 영감을 얻은 아이디어들을 연결하다 보면 어느 순간 제 머릿속에 새 프로젝트에 대한 그림이 그려집니다. 그래서 창조는 네트워킹, 즉 융합(Convergence) 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A를 보면 A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B를 생각해보고, B를 발견하면 C를 생각해보고 ABC가 연결이 되면 그게 또 새로운 결과물이 나오게 됩니다. 요즘을 융합의 시대라고 합니다. 융합은 기술, 전문지식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아이디어들을 연결하는 데에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매주 금요일마다 탈북청소년학교인 여명학교에서 미디어교육을 맡고 있는데 영상이 창조성과 굉장히 잘 맞는다는 걸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애들이 다른 수업 때는 일방적으로 앉아 수업을 듣는데 미디어 수업시간에는 자신들이 직접 시나리오를 만들고, 촬영하고, 편집도 해야 합니다. 세 컷의 영상을 찍는다고 하면 그 세 컷 안에 자신들이 표현해야 할 것들을 전부 담아야 하니 아이들의 경험과 지식과 표현능력들을 보여줘야 하죠. 시나리오를 쓰느라 글을 써야 하고, 한 단어, 한 단어 미디어 언어로 표현해야하니 고민해야합니다. 이 과정 속에서 창의적인 생각을 많이 하게 되니 영상미디어 교육이 애들에게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죠. 

창조는 협동에서 나온다


제가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많다보니 몸이 둘이라도 모자랄 지경이죠. 뭔가를 할 때 일이 많거나 바쁘기 때문에 힘들기보다 같이 일을 하는 사람들과 호흡을 맞춰가는 게 제일 힘듭니다. 시작은 혼자 하더라도 사람들과 같이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죠. 서로 호흡이 잘 맞으면 일 진행도 빨라지고, 새로운 아이디어들도 생겨나는데 이 협동이 쉽지는 않습니다. 우리나라 교육은 함께 협동하여 뭔가를 만들어내기보단 서로 경쟁하도록 만든다는 겁니다. 대학교 때까지 상대방과 경쟁하는 시스템 안에서 교육받은 인재들은 졸업 후, 회사에 취직하려고 하지만 회사에서는 창의적이고, 팀웍을 잘하는 인재를 찾습니다. 교육을 통해 배출하는 인재와 사회가 원하는 인재 간에 모순이 있는 거죠.

교육으로 유명한 나라 핀란드는 누구도 1등을 원하지 않고,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협동하도록 만듭니다. 이것이 대한민국 교육시스템이 풀어야할 문제이고 동시에 창의적인 인재를 만드는 길이 아닐까요?

창조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선 개인의 노력도 필요하겠죠. 저는 매일 아침마다 강아지 조이와 산책하면서 묵상을 하는 시간을 갖는데 주로 그때 아이디어가 제일 많이 떠오릅니다. 세상에 새로운 창조는 없습니다. 이미 창조되어 있는 것들을 우리가 발견하거나,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연결시켜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창조죠. 






Sunday, May 19, 2013

Joseph Resume



Education

    2013 Graduated Konkuk University Veterinary Medicine
College of Veterinary Medicine, KonKuk University Seoul, Korea         
                     

Work Experience


    Clothing Distributor , 1997-1999
Independently bought clothing imported through China at Rason and distributed to Hwanghae Province, DPRK 

    Shepherd, Yanji City in China 1999~2000

    Smuggler, Holung City, China 2000-2001
Worked under a cartel that distributed Korean and Japanese cars shipped through North Korea and sold in China.

    Hotel Manager, Weihai City, China 2001-2003
Supervised hotel staff and assisted customers from China and South Korea

    North Korean labor school at Jesus Abbey, Taebaek, ROK 2006-2011
Taught youth and young adults about North Korean people, life, and experiences. Taught and managed morning farm labor.
                                                                                                                                        
    Diaspora Young-adult Forum Director, 2010-2011
Founded, planned, and organized forum conference for Korean Diaspora.
        
    Chief Producer of Music Video, The Day, 2011-2012

    Save My Friend campaign Director, 2012
Worked to gain international awareness of North Korean refugees forcible repatriation to North Korea and rallied for release of prisoners in China                                                                                                                               

Related Interests:

    Public Health and international development.
    Social Entrepreneurship and North Korea development